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2005년 여름의 끝자락, 말복이라 다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친구가 손수 끓인 삼계탕을 내왔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먹을 수가 없었다.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살짝 꼬아 놓은 다리와 찹쌀로 불룩해진 배가 먹음직스럽기는커녕 죽은 생명체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십 번도 더 먹었던 삼계탕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친구 자취방에 진동하던 닭고기 냄새와 그 한 그릇의 삼계탕에 대한 인상은 내게 불편한 마음을 남긴 채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캐럴 아담스의 책 『프랑켄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를 보면 "동물이 도살되는 순간 동물이 고기라는 음식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동물은 고기를 먹는 행동에 부재한다"는 의미의 '부재지시대상'이라는 말을 찾을 수 있다. 즉,"고기라는 말과 고기의 각종 부위를 가르키는 단어들은 독립된 실체로서 동물을 망각하도록 만들고, 그런 동물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날개, 가슴살 같은 특정 부위가 아니라 살아있는 닭의 형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삼계탕을 보면서 삼계탕에 부재하는 동물로서 닭을 떠올렸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부재하는 대상으로서 동물의 존재를 인식한 순간 나는 왜 삼계탕으로 변한 한 마리의 닭을 보고 반감이 들었던 걸까? 리처드 불리엣의 『사육과 육식』이라는 책에서는 인간의 역사를 사육화 따라 크게 전기사육시대, 사육시대, 후기사육시대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중 사육시대는 애완동물이 아닌 가축과 대다수 가족 구성원이 날마다 접촉하면서 살아가는 시대로 도시화 이전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의 사람들에게 가축의 도살은 당연한 일이었고 축산물을 소비하는 데도 양심의 가책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후기사육시대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동물과 물리적, 심리적으로 떨어져 살아가게 되고 동물의 출산과 교미, 도살 과정을 직접 보는 일은 드물어진다. "사람들은 여전히 동물이 제공하는 제품을 풍부하게 소비하면서도 심리적으로는 사육된 동물이 제품으로 바뀌는 산업적인 과정과 이런 산물이 시장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서 윤리적 불안감과 죄의식을 느낀다."
후기사육시대를 살고 있는 나 역시 예외는 아닌 것 같다. 7살 때 어머니께서 편찮으신 할머니를 위해 집에서 기르던 거위의 목을 비틀어 생피를 받는 광경을 보았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3년째 채식을 하고 있지만 『사육과 육식』에서 지적한 후기사육시대 사람들의 모순은 내게도 여전히 딜레마이다.
막 채식을 시작했을 때의 가장 큰 이유는 채식과 육식의 경제성 때문이었다. 한 덩이의 고기를 식탁에 올리기 위해서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먹어도 충분할 만큼의 엄청난 곡물이 동물 사료로 소비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실제 우리가 고기를 통해 얻는 에너지는 채식으로 먹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곡물 재배면적의 과도한 증가는 야생동물의 서식지 파괴를 초래하고, 육식을 선호하는 식단은 비정한 공장식 사육 시스템을 강화한다. 그리고 나는 공장식 사육의 끔찍한 실체를 알게 될 수록 고기를 먹기가 불편해졌다.
『사육과 육식』에서 소개하고 있는 스티븐 시먼스라는 동물권리운동가는 오늘날 동물사육에 숨겨진 착취와 도살을 홀로코스트를 야기한 인간의 태도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는 "동물들은, 어떤 생명은 다른 생명보다 훨씬 더 값어치가 있으며, 힘 있는 자는 힘 없는 자를 착취할 자격이 있으며, 따라서 약자는 보다 나은 공공의 선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계관에서 초래된 사상자이다."라고 이야기한다. 평생을 좁은 우리 안에서 살며 스트레스로 자신의 몸을 쪼는 닭과 그로 인한 상품 손상을 막기 위해 절단기로 부리를 잘라버리는 인간. 우리의 밥상이 이렇게 잔인한 폭력과 착취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이것은 한 끼를 때우는 차원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수많은 생명과 나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혓바늘만 돋아도 침 삼키는 것이 괴롭고 하루가 고생스러운데 모든 말초신경이 모여 있다는 부리를 잘린 닭의 하루는 과연 어떨 것인가. 급진적인 동물보호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을 조금 더 평화롭게 가꾸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채식이라는 오히려 더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렇게 당연해 보이는 실천이 채식주의자로 구분되는 일부 사람들의 극성처럼 비춰지는 것은 왜일까. 모두가 옳은 것, 정의로운 것을 알고 있다하더라도 우리의 현실이 정의롭지만은 않은 것처럼 채식을 시작하면서 맞닥뜨린 다양한 상황 속에서 채식 또한 채식을 해야 하는 당위적인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훨씬 복잡한 문제들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채식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못 먹다니"하며 안타까워하는 사람, 식물도 생명인데 채소는 왜 먹느냐고 따지는 사람, 마치 광적인 페미니스트나 사회주의자를 대하듯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으레 짐작하고 외면하는 사람 등. 아직 채식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탓에 채식을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목 모임부터 회식 자리에 이르기까지 채식주의자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서 발언대에 서야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는데 '일반인'으로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있다가 마치 동성애자나 양심적 병역 거부자처럼 어떤 사한에 대해서 갑자기 소수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저는 채식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의 평가가 시작된다. 그리고 갑자기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만들어지면서 나는 그 경계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이런 상황들을 겪으면서 아직까지 우리사회에서 채식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생활방식 안에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고, 우리는 다른 생활양식이나 가치관을 이해하거나 인정하는 것에 무척 서툴다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어떤 사안에 대해 소수자가 된다는 것은 그 일이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작됐다 하더라도 그 사안이 어떤 '입장'을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 있다면 개인이 아닌 소수를 대변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더 공부하고 발언해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채식을 해야 하는 당위적 이유를 고민하고, 채식을 하면서 일상의 작은 부분도 새롭게 의식하게 되면서 이것이 단순히 고기반찬을 나물반찬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삶을 돌아보고 끊임없이 "당신은 잘 살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하고 먹는다는 것은 하루 세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일이기에 채식은 자신의 일관성을 실험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도 모른 척하고 싶었던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시험지인 것 같다.
『사육과 육식』 마지막 장에서는 인간과 동물 관계의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동물을 한낱 산업상품으로 변질시키는 빈곤한 상상력이 아니라 후기사육시대의 동물들에 대한 정형화된 사고방식을 훌쩍 뛰어넘어, 상상력의 영역이 그 옛날 동물이 신과 교감하고 반인반수가 존경받던 시대까지도 확장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진정한 상상력이 사고의 경계를 넓히고 동물과 식물의 처지까지도 돌볼 줄 아는 삶의 영역에 대한 총체적인 확장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채식은 나의 상상력의 척도를 시험하고 또 돌아볼 수 있는 굉장히 유용한 삶의 방식인 것 같다.
하루 세 번 밥상머리에서 삶을 고민하고 나를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마음 편히 밥도 못 먹는다는 핑계로 지나쳐 버리기엔 관념의 틀을 깨며 살아있는 삶의 기쁨을 느끼는데서 오는 행복이 더 큰 것 같다. 누구라도 내 삶의 이면을 보고 싶다면 '즐거운 불편'으로서 채식을 시작해보시길.
<INDIGO+ing> 12호에 쓴 글

